2020. 12. 2. 21:22
에이버리 하오란 오닐은 소위 말하는 착한 아이였다. 언제나 밝게 웃었고, 어른들의 말을 잘 들었으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불량한 행동을 하지 않아 어른들이 걱정하지 않았다. 교우 관계도 이 정도면 훌륭하지. 매 방학마다 몇 장씩 날아오는 편지지들과 선물, 그리고 에이버리가 여행을 갈 때마다 캐리어 하나에 꽉 채워오는 작은 기념품들을 보며 부모님이 말했다.
그런 착한 아이에게 있는 유일한 단점은 고집이라고 해야 할지, 집착이라고 해야 할지. 집요함이 여느 아이들과 남달랐다. 눈치가 빠른 탓에 화를 내려고 할 때면 관심을 끄고 입을 싹 닫아버리는 통에 제대로 혼내지도 못했다. 물러날 때를 아는 아이.라고 증조할머니가 말했다.
오닐 집안은 가족애가 돈독했다. 모든 가족이 서로를 아낀다.라는 말도 맞았지만 그것보단 본가 유일의 어린아이인 에이버리를 중심으로 가족들이 뭉치는 것에 가까웠다. 토요일 아침과 일요일 저녁은 물론이고, 아직 청년에 가까운 부모님을 대신해 노인인 조부모와 증조모가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떠나는 것도 다 에이버리를 위해서였다. 오닐이 세계의 마법 용품을 수입하고 있으니, 그만큼 세계를 돌아다니며 물건 보는 눈을 높여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주장이었다. 물론 강요는 아니었다. 실제로 여행 코스는 관광에 가까웠으니.
동유럽 일주의 마지막 목적지는 헝가리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의 지인 댁이었다. 커다란 호수를 끼고 있는 집 중 하나였다. 여름임에도 호수 위를 날아다녀 식은 바람이 불어오는 곳.
"리하르트 할아버지께선 좋은 곳에 살고 계시네요!"
"하하, 길리엄. 자네 손자가 내 집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은데, 이 참에 두고 가는 건 어떤가?"
"자네 농담도 참. 우리 에이브는 내가 잘 챙겨 갈 테니 걱정 말게."
에이버리는 거실에 있는 창밖을 보더니, 바로 증조할머니에게로 달려갔다. 이제 100세가 되었는데도 놀랍도록 건강하고 정정하셔 동유럽 일주까지 하는 분이다. 근육이 빠진 다리에 지팡이는 필요하지만 부축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증손자의 부축은 뿌리치지 않았다.
"할머니, 밖에 호수가 예쁘죠? 있다가 밤에 산책해요! 그래도 되죠, 할아버지?"
"녀석. 이 할머니 나이가 제일 많은 어른인데 어디에 허락을 받는 게냐? 또 별자리 이야기해달라고 그러는 거지?"
"헤헤, 다 아시면서. 이잉, 부탁해요. 할머니이~"
여느 아이들처럼 떼쓰기보다는 적당히 애교를 부리는 모습에 집안에 있던 노인들의 웃음 꽃이 피어났다. 노인과 아이가 평화로운 공간에 있는 이상적인 풍경이었다.
밤이지만 적당히 선선한 탓에 외투를 걸치지 않았다. 혹시 모를 겉옷은 들고 왔지만. 고개를 들어 별을 보고, 호숫가를 거닐며 에이버리와 할머니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언젠가 편지에서 했던 이야기들도 있지만 지겹단 기색없이 잘 들어주시는 편이었다. 조곤조곤한 어린아이의 말이 물결을 타고 흘렀다.
"-그래서, 친구에게 할머니 이야기를 해드렸더니 멋있다고 해주었어요. 아, 두 명이 말해주었어요. 캐롤하고 리브렛인데, 캐롤은 래번클로 친구예요. 조만간 키를 따라잡으면 제가 업어서 슬리데린에 데려가겠다고 했고요. 캐롤은 저보다 이만큼 더 커요. 리브렛은 그리핀도르인데요, 도서관에서 절 놀라게 했지 뭐예요. 저도 놀라게 하겠다고 벼르긴 했는데, 결국 방학이 찾아와 버렸어요. 방학이 지나고 새 학년이 되면 잊었겠죠? 복수를 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호수는 넓었고 밤공기는 선선했다. 두 사람은 느리고 오래 호수가를 거닐며 이야기를 나눴다. 나눴다기 보단 에이버리의 일방적인 이야기 쏟아내기 시간이지만.
"-해서, 친구들의 즐거운 방학을 기원할 겸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타로를 봐주었어요. 전 아직 미숙하지만 그래도 8명이나 보고 갔다니까요! 대부분 좋은 결과가 나왔었던가.. 아무튼 즐거웠어요. 리타는 다른 카드가 더 없냐고 물어봤는데, 그래서 할머니, 저 다른 카드나 타로 말고 다른 점..."
"에이버리."
"응! 뭘까요?"
말없이 손자의 이야기를 듣던 할머니가 별안간 에이버리의 말을 끊었다. 오래된 피부가 탄력을 잃고 눈매를 쳐지게 만들었지만 눈빛만은 별보다 반짝이고 매서웠다.
"헛된 것에 자꾸 관심 가지지 마라. 점술, 그거 다 미신이고 마법으로 증명할 수도 없어. 그냥 우연으로 맞는 거지. 심신 안정 용도야."
"그렇지만 할머니는 마을에서 유명한 점쟁이셨다면서요. 증조할아버지 만날 것도 알았구."
"... 우연이야. 우연. 사람들의 희망과 우연을 팔아먹는 것이 점쟁이지.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하지만, 넌 그런 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전 할머니가 하는 일이 자랑스러운-"
"에이버리 오닐."
"... 알았어요."
할머니가 혀 차는 소리를 내며 손자의 풀네임을 부르자, 에이버리는 금세 꼬리를 내렸다. 처진 눈썹과 아래로 향한 시선이 안쓰러웠다.
이제 돌아가야겠구나. 너무 멀리 온 것 같아.라고 말한 조손은 몸을 돌려 지나온 자리를 다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