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14. 04:35
원래부터 낯선 곳을 힘들어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경계심을 있을지라도 적응력만은 누구보다 좋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3층이 무너진 후였고, '시체들의 왕'을 만났으며, 친구들 몇몇이 쓰러지는 전투와 워프의 고장으로 인해 원하지 않는 낯선 곳에 왔다. 스트레스에 취약한 편은 아니었으나 잠을 못 이루고 사색에 빠질 이유는 충분했다. 그래서 헤일로는 자연스럽게 '그 날'을 떠올렸다.
낡은 식탁이 덜그럭댈 때까지 음식을 올려두었다. 워낙에 대가족이기도 하고, 손이 컸기 때문에 식탁은 금방 음식들로 가득해졌다.
-왜 이리 집에 뜸하게 오니? 아카데미가 그렇게 재밌어? 가길 잘했네.
겨울 휴가로 집에 온 김에 든든하게 먹여서 키를 키워주겠다는 알레사와 밀다의 포부에 헤일로가 웃었다. 그럼 내가 형 키를 뺏을래! 나도! 하는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낮은 웃음소리와 키는 뺏는게 아니야- 하는 목소리가 정겹다. 왁자지껄에 가까운 말소리들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 그래. 여기까진 행복했다. 정말이지, 탑에 들어온 이후로 좋은 일의 연속이었다고, 자신은 정말 행복하고 운 좋은 이라고 생각했다. 어리광을 받아주겠다는 친구, 뭔가 챙겨주는 친구, 어제든 놀아주는 친구가 생긴 건 물론이요, 원래의 가족들은 더 이상 배 곪지 않고 재앙에 떨지 않으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최고는 아버지가 생긴 것이겠지. 시스템을 통한 메시지뿐이라도 아버지의 따뜻하고 무한히 대가 없는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탑 밖을 떠돌던 비뚤어진 아웃 차일드에겐 과분할 정도의 행운들이었다.
그 과분한 행운을 질투한 것은 다름아닌 가족인 스탠 아저씨였다. 시스템 창에서 이름이 바뀐 것을 모두가 축하해주던 때였다. 성좌님의 아들이라니, 네가 자랑스럽다 헤일로!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어졌던 아저씨 말을 꺼낸 것이 바로 그 후였다.
-그 성좌님은 너를 진짜 아들이라고 생각한대?
-아, 거참... 아버지가 저 친아들처럼 여긴다고 하셨거든요?!
-아니, 진짜 그렇게 '말'했냐고. 그 시스템 메시지인지 뭔지로 뜬 거 아니야? 그럼 조작도 가능하겠네. 나도 글로는 널 아들같이 생각한다, 사랑한다, 100번은 한다. 네가 아직 어려서 뭘 모르나 본데, 그 성좌님도 원하는 거 있어서 너 이용하는 거야. 생판 남인 애를 갑자기 친아들처럼 여겨? 얼마나 봤다고. 선물? 허, 참. 물질 공세겠지. 그런 건 돈만 있으면 누구나 하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꼬맹인 거야. 진짜 호의랑 이용하려고 주는 호의랑 구분을 못하잖아? 분명 그 성좌님 너 같은 애들 수두룩 계약해놓고 쓸모없어졌다고 판단하면 바로 쳐낼...
3년이나 지난 일임에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단 사실이 괴로웠다. 기분 좋았던 일들은 인벤토리와 메모장에 적어두고 꺼내봐야 기억이 나는데, 이런 건 어디에도 저장하지도 않았건만, 수시로 떠올라 괴롭게 만들었다. 다 같은 곳에서 자는 바람에 이상한 소리 하나라도 냈다간 들킬 것이다. 그래서 헤일로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그 뒤는? 분노한 제가 그만하라고 소리치며 식탁 다리를 걷어찼다. 큰 이유도 없었다.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위협표시였고, 분노의 표현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낡은 식탁 다리가 부러진 것이지. 그 뒤는 뭐.... 난장판이었다. 그릇 조각과 음식이 뒤섞인 곳에서 당신이 뭘 아냐고 바락바락 대들다가 결국 뺨까지 맞고 집을 뛰쳐나왔다. 그렇게 3층 대부분의 구역을 서성거리다가 새벽 늦게 집에 들어가려 했었으나, 결국 두드린 건 근처에 사는 알리마네 집이었다.
이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유없이 상처를 준 아저씨가 싫었고, 저와 아저씨 때문에 최악의 날 하나를 안겨주게 된 다른 가족들에게도 미안했다.
―는 것은 핑계고 그냥 가기 싫었다. 이제 부정적인 감정만 남은 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용맹이니 이겨낸다느니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 도망친 것이었다. 남들의 이야기로 들었다면 분명 그렇게 해서는 해결되지 않아. 그냥 마주하고 이야기를 하며 풀어봐! 서로 이해한다면 화해할 수 있을 거야! 따위의 이야기를 했겠지. 남의 일이라고 마구 말하는구나. 아까까진 울려고 했으면서 지금은 조소한다. 피곤해서 이상해진 건지.
그래. 애초에 어딘가 막혀서 자란 아이가 제대로 클 리가 없지. 어디가 막혔는지도 모르고 그게 원형이라고 생각하고 뒤틀려서 자란다. 그러니 지금에서야 제자리를 찾은 게 아닐까. 뒤틀렸으면서 멀쩡한 척, 오히려 더 나은 척하고 있으니 제가 생각하기에도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큰 깨달음은 아니었다. 집을 나온 날부터 꾸준히 생각해서 결국 오늘 밤 인정한 것이기에 감동이나 충격은 없었다. 오래 걸렸구나. 하는 감상뿐.
아, 후광이 아닌 그저 빛의 잔해구나.
이래서 탑을 오를 수야 있겠는가.
내 기어스는―
탑을 오르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모든 기억'을 걸고!
정신은 멀쩡하고 몸은 피곤하니 고역이었다. 감았던 눈을 뜨자 어둠에 익숙해진 풍경들이 보인다. 물먹은 듯 무겁게 짓누르던 이불이 가벼워졌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한번 돌아보고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다시 싶은 생각에 빠지기 전에 잠에 빠져야 했다.
아직은 더 예전처럼 있자.
인정했더라도 급하게 변하지 말자.
시간은 많고, 갑자기 바뀌면 주변도 걱정할 것이고, 특히 아버지가 걱정할 테니까.
오래 걸려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 파악도 꽤 걸리지 않았는가.
그동안 조금만 더 놀고, 어리광 피우고, 기대고... 그 뒤에 홀로 서자. 애초에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아야 했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적어도 자신이 올곧은 사람이라고 믿지 않았을 텐데. 누군가의 애정과 호의를 어설프게 받아내지 않았을텐데. 애초에 소통이 서툴러 제가 일방적으로 끊어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을 텐데...
그러니까 가든에 돌아갈 때까지만 이러고 있자고,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가 보자고 다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헤일로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피곤한 만큼 깊은 잠이 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