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heth -5-

2023. 3. 24. 03:36

야벳 하갈라야의 과거는 생각보다 불우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를 두려워 손을 대지 않았다지만, 어머니의 빈자리만큼 아버지가 더 신경 쓰고 채워주었다. 괴상한 아가리를 여는 아들을 꽁꽁 숨길 수도 있었지만, 그도 자라서 나중에 한 개체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며 없는 형편을 아껴 형제를 학교에 보냈다. 둘은 성실하게 학교에 다녔다. 그의 형 셈은 일찍이 의젓하고 영리하여 어머니와 야벳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그래서 어머니와 야벳 사이에 마주침을 줄이려고 자신과 친구들이 노는 사이에 동생을 끼워주었다. 야벳이 또래보다 키가 커 셈과 쌍둥이 같아 보였고 운동도 잘했기에, 셈의 친구들은 어린 동생과 노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매일 학교가 끝나고 저녁이 될 때까지 놀다 집에 들어갔다. 집에 돌아가 땀으로 젖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감고, 물수건으로 몸을 닦고 나오면 모두 함께 저녁을 먹었다. 화목하다면 화목한 가족이었다.

 

어린 야벳이 무엇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지금의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편애가 그로서 형을 질투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자신보다 10점은 더 점수를 받아오는 형이 미웠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말 그대로 아가리에 사람을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을 수도 있다. 무슨 이유든 야벳은 그 평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형을 빼고 자신을 집어넣으려 했다. 아가리를 열고 형을 밀치는 순간, 어머니에게 들켜 실패하고 크게 혼났다. 이후 가족의 화목이 묘하게 깨졌음을 깨달은 야벳은 집을 떠나기로 했다. 이것 또한 왜 떠나려고 했는지 자세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에게 있어 이유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고향이라는 단어는 마법과도 같아서, 불시에 사람을 치고 온다.


햇빛에 달궈진 흙냄새, 저 멀리 모래와 먼지를 실어온 꺼끌한 바람, 길게 늘어진 땅거미, 좁고 더러운 골목. 그곳을 지나면 징그러울 만큼 다닥다닥 붙어있는 낡은 빌라들. 오래되어 무거운 문고리를 돌리면 녹슨 경칩이 이상한 소리를 질러댄다. 현관에서 방 끝이 보이는 좁은 집. 미묘하고 퀴퀴한 곰팡내. 이름 모를 형들에게서 물려받은 운동화가 현관에 벗어지면 저와 비슷하게 생긴 형이 벌겋게 익은 얼굴로 방금 채운 물컵을 내민다. 


"축구 재밌었지! 오늘 이긴 건 야벳, 네 덕분이야."


그 말이 뿌듯했던가, 마신 물이 차가웠던가. 나는 그때 무슨 대답을 했더라.
복잡한 것이 싫어서 쓸모없는 건 잊고 도움 되는 것만 남겨두기로 했는데. 제일 쓸모없는 것이 쓸데없이 선명해 고향을 그리워하는 머저리로 만든다. 

 

"하갈라야 하사! 정신 차려! 상처가 깊은 것 같으니 대답하지 말고 후방으로 빠져. 이건 명령이야!"

 

이게 왜 찢어졌지. 한낮에 크리처와 싸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자신이겠지. 달궈진 흙냄새가, 햇빛에 벌겋게 익은 피부가, 물 마실 틈도 없이 바쁜 전투가 야벳을 순간 집으로 데려다 두었다. 정신 차리니 검 하나는 부러지고, 입은 찢어져있었다. 마지막 기억이 '목말라' 였다고 말하면 상처고 뭐고 얼차려 감이라고 생각해 상관에게는 대충 얼버무렸다. 전투 중 넋을 놓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까우나, 천만다행으로 근처에 있던 상관이 구해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마지막에 제 발로 떠난 고향을 그리워하다 죽은 멍청한 놈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탈라를 떠나는 열차에서는 이대로 아무 정거장에서 내려 익숙한 골목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꿈을 두 번이나 꾸었다. 집을 떠난 이유는 그곳이 야벳의 요구를 채워주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아서다. 화목한 가정을 망친 죄책감이니, 위험한 정신상태의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과 가까이 두고 싶지 않니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곳을 안정적인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나 보다. 집을 나와 연고도 없는 곳으로 간다는 희미한 불안감에 그런 꿈을 두 번이나 꾸었으니.

하다 하다 이제는 웰링턴을 자르다 손을 베였다. 웰링턴이라면 식당에서 일할 때 500개는 썰어봤을 텐데,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방심했는지 상처가 꽤 깊다. 익숙하게 흐르는 물에 상처부터 씻고 앞치마 자락으로 지혈한다. 앞으로 자를 웰링턴이 많이 남았으나, 먹을 사람들이 돈을 낸 손님이 아닌 대원들인 것은 다행이다. 자상이나 화상은 요리를 오래 했던 사람답게-물론 전투로 얻은 상흔도 있지만, 요리할 때는 맨손이므로 요리의 비중이 많다.- 이미 손부터 팔뚝까지 가득했으므로 다친 것은 호들갑도 떨지 못할 일이 되었다.

 

이번엔 또 무엇이 그를 그 집으로 데려갔나. 규칙적으로 들리는 야채 써는 소리, 고기 잡내를 잡기 위한 탈라의 향신료, 오늘따라 선명하게 기억나는 옛날의 저녁시간. 이게 다 최근 고향이야기를 많이 한 탓이야. 이럴 때마다 기분이 굉장히 더럽다. 빌어먹을 기억같으니. 아무도 없는 주방에서 욕을 중얼거리며 저녁을 알릴 준비를 하러 갔다.

 



이런 식으로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그는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허기를 느낀다. 이건 음식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닌 줄만 알지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모른다. 이 공복은 영원히 채울 수 없을 것이고, 허기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마치 아귀(餓鬼) 같다고 자조한다.

이제 굶주림을 참을 줄 아는 어른으로 커서 아무거나 삼켜버리려 하는 일은 없으니 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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